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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행사

[43회 기획전]백치 동인 자료전

등록일 :
2019-07-03 05:35:59
작성자 :
문화유산육성과(055-225-7193)
조회수 :
239

백치동인 황성혁님 방문

백치동인 황성혁님 방문

[황성혁 동인 방문]

기획전 열림식 행사날에 참석하지 못했던 황성혁 동인이 7월 2일(화)에 전시장을 방문했습니다.

•1939년 출생, 1958년 마산고등학교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선공학과 졸업, 한국기계 입사
•1972년 현대중공업 입사 / 런던지점장
•1989년 선박영업 담당 전무 퇴사
•1990년 황화상사 설립, 2011년 석탑산업훈장 수훈
• 저서 《넘지 못할 벽은 없다》 《Let There Be A Yard》 《사랑 인생길에
서 익다》

황성혁 동인의 방문 소식을 들은 백치동인 이광석, 김용복 시인과 오하룡 시인, 장기홍 작곡가가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 황성혁 시인은  "백치시대"라는 글에서 백치동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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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시대白痴 時代 / 황성혁

 1955년은 내게 가장 활기차고 행복한 해였다. 마산고등학교에 입학을 하였고, 아름다운 학교에서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지금까지 함께하는 훌륭한 동기들을 만났고, 그리고 백치동인들과의 해후가 있었다. 인근에서 가장 존경받던 이상철 교장이 계셨고 이원섭, 김상옥, 이훈경, 이석 선생들이 국어를 가르쳤다. 김춘수 선생은 해인대로 옮기셨지만 가끔 모습을 보여주셨다.

 우선 제하를 먼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크나큰 행복이었다. 여름날 점심시간이면 우리는 도시락을 들고 학교 뒷산 잔솔밭을 찾곤 했다. 도시락은 뒷전이었다. 거기서 솔밭 그늘 바위에 앉아 아름다운 합포만을 내려다보며 많은 꿈을 키웠었다. 어느 날 나와 함께 간 친구가 숨이 넘어가는 듯 더듬거리며 속삭였다. “저기 봐라. 제하가 있다. 이제하다.” 이제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름은 항상 듣고 있었지만 나는 그를 그날 처음 보았다. 그는 졸업반이었다. 그때 전국적으로 출판되는 모든 잡지에서 이제하는 그의 문명을 날리고 있었다. 길다란 얼굴에 훤한 이마 그리고 아주 선량한 인상이었다. 그는 청솔 그늘에 앉아 기도를 드리더니 혼자 도시락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확신했다. 예수그리스도의 얼굴은 제하의 얼굴과 꼭 닮았으리라고.

 그해 시월 한글날, 백일장이 있었다. 전교생이 참여했었다. 이상철 교장은 전인교육의 일환이라고 했다. 나는 산문을 써 냈었다. ‘하늘’이라는 제목이었다. 별로 준비한 것이 없어 그 푸르고 투명한 가을 하늘을 날고 싶다는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이 입선이 되었다. 그리고 잊어버렸다.

 이훈경 선생이 시작한 도서관에 일년 내내 매달렸었다. 점심시간과 수업 뒤에는 책을 빌려주고 되받아 정리하는 일로 정신이 없었다. 이훈경 선생은 책을 고르는 일도 가끔 내게 맡겼다. 나는 책방에 가서 보고 싶은 책을 있는 대로 골라 도서실로 가지고 왔다. 그리고 읽고 싶은 만큼 집으로 빌려 와서 읽었다. 그 일년 동안 나는 일주일에 서너 권의 책을 읽었다. 세계의 고전은 그때 거의 다 읽었다. 독후감을 몇 줄씩 적어가며 매달리듯 책과 씨름을 했다. 도서실 일을 도우며 책을 읽으며 책에 파묻혀 지낸 한해였다. 지금 책을 읽는 것은 그 시절 읽은 것들의 반추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다. 눈코 뜰 사이 없이 도서관 일을 하면서도 누군가 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염기용이었다. 일이 조금 잠잠해지자 그는 나를 불러내었다. 한 해 위 선배였다. 그리고 느닷없이 백치동인에 가입하라는 것이었다. 문학을 하는 모임이라고 했다. 문학이 뭔지, 동인이라는 것이 뭐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거기 이제하가 함께한다는 말에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두 해 위에 이제하, 변재식, 강위석, 송상옥, 이광석 등이 있었고, 한 해 위는 염기용, 김성택(김병총), 조병무 등이었다. 여학생 동인으로는 박현령, 임혜진, 추창영, 김만옥, 임혜자 등이 있었다. 나와 같은 학년으로는 임혜자 정도였다. 

 백치동인은 내 두 해 위 형들이 졸업을 하고 서울로 부산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다음해 3월까지가 전성기였다. 나는 막내였기 때문에 별 스스럼없이 아무데나 끼어들었다. 변재식의 집으로, 이제하의 집으로, 임혜진, 추창영, 김만옥의 집으로 놀러다녔다. 변재식의 넓은 적산가옥은 넓은 만큼 으스스했다. 긴 대나무 숲길을 지나 들어갔다. 대나무 바람 소리는 겨울엔 특히 을씨년스러웠다. 거기 넓은 다다미 방에 자주 모였다. 작문 연작을 가끔 했다. 한 사람이 시작을 하면 옆 사람이 이어받아서 완전히 한바퀴 돌 때까지 쓰곤 했다. 그것이 끝나면 돌려가며 읽었는데, 구석구석에 박힌 재치들로 배꼽을 잡았었다. 

 노래도 돌아가며 불렀다. 그때 유행하던 ‘라쿰파르시타’는 변재식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그는 가사도 몰랐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라쿰파라 시타야 시타’만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했었다. 그것도 멋이 있었다. 그의 약간 일본식 한국어로, 혀가 짧은 듯한 발음으로 무대를 쩌렁쩌렁 울리던 카리스마는 서울 올라가서 몇 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몸이 불편하다고는 했으나 그처럼 맥없이 사그라들 줄은 몰랐다.

 이제하의 집은 북마산 노비산 오르는 길의 중턱에 있었다. 밝고 따뜻한 집이었다. 거기서 자주 모였다. 김성택이 펜싱이라는 것을 즐겨 하였으나 나는 별로 끼어들지 못했다. 어느 날 이제하의 방에 누가 붙여 놓았는지 노래 가사 하나가 있었다. 슈베르트의 ‘보리수’에 붙인 가사였다. “백치 끼리끼리 골목을 걸어가며….” 한동안 그 노래도 즐겨 불렀었다. 이 학년이 되어 나는 학보 편집을 하며 한 해를 보냈다. 일 년에 한두 번 나오는 학보는 나의 시간을 온통 잡아 먹었다. 그때 추창영은 마산 방송국 아나운서로 마산에 남았다. 가장 아름다운 때의 진몬즈보다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마산 방송국은 선배들이 떠난 마산에서 내게 남겨진 유일한 오아시스였다. 

 심심하면 놀러가서는 피아노 연습도 하고 라디오 드라마도 만들었다. 삼 학년 올라가던 해, 나는 큰 변절을 하였다. 공과대학을 지망했던 것이다. 문학적 재능으로 보아 제하, 상옥, 병총을 따라갈 것 같지 않았고, 또 그때 집안 형편으로 보아 공과대학이 앞으로의 삶을 좀 쉽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아주 적절한 변절이었다. 글을 쓰는 것을 소홀히 여기는 공대 출신들 속에서, 나는 백치동인의 경험으로 글 쓸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남다른 경험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글로 남길 수 있었다.

 공과대학 다니면서도 백치로의 쏠림은 계속되었다. 공과대학이 처음엔 싫었다. 외삼촌 댁이 있던 영등포에서 태능까지 가려면 버스를 세 번을 타고 두 시간씩 차에서 시달려야 했다. 제하를 보고 싶으면 그저 명동 입구에서 내려 돌체로 갔다. 거기 그가 없으면 르네상스로 갔다. 거기 가면 누구든 만날 수 있었다. 돌체의 변소로 오르는 질퍽거리던 층계를 오르내리기가 끔찍스러웠지만 헛구역질을 해 가며 담배도 시작했다.

 학교 가기 싫으면 또 종로 5가에서 내려 문리대의 김만옥에게 갔다. 그녀의 친구들과 함께 송욱 교수의 ‘시론’을 도강했다. 나 같은 도강꾼들이 많았던지 대 강의실이 언제나 만원이어서 창밖에서 서서 듣곤 했다. 언젠가 명동의 ‘여원’사에 들렀었다. 우리 중에 제일 멋진 여자 임혜자가 거기 기자로 있었다. 그녀는 나를 채근해서 황순원 선생님께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계절의 미각을 좀 갖다 드리려는데 마침 동행이 생겨 잘됐다’는 것이었다. 원고 쓴 것 있으면 가져오라는 황 선생의 말씀을 들었다. 임혜자는 그러라고 채근했다. “공대생이 뜨면 문과나 문예창작과 아이들은 뭘 먹고 사노” 나는 내 재능 없음을 그렇게 변명했다.

 어느 비 오는 날, 일요일 아침에 강위석의 신촌 하숙방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벽에 여자 친구 스케치를 그려놓고 “니 한잔 무우라. 자 이그는 내 잔이다”라며 혼자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내가 들어서자 진짜 술판이 벌어졌다. 수더분한 하숙집 아주머니는 싫다 소리 없이 가져오라는 대로 소주병을 날랐다. 그는 자랑을 했다. “혁아, 나는 말이다 예술적으로 토할 수 있다, 아나. 나는 절대 왈칵 안 토한다. 토하고 싶은 만큼만 토하는 기라.” 그리고 그는 입의 한쪽으로 찔끔찔끔 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비예술적으로 왈칵 한꺼번에 다 토하고 그 구토 속에서 늘어지게 한숨 자고 그날 오후 느지막하게 내 가정교사 하던 집으로 돌아왔다. 가며오며 그 냄새와 그 더러움을 어떻게 처리했던지 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날 우리는 세 시간 동안에 소주 스물세 병을 비웠다고 했다.

 이제 뿔뿔이 흩어졌다. 변재식과 임혜자는 떠났다. 염기용, 조병무와는 가끔 만난
다. 김만옥과 가끔 소식을 나눈다. 세상에서 가장 귀에 솔깃한 것은 백치들에 관한 소식이다. 그 따뜻한 사람들. 나를 지금까지 키운 것은 팔할이 백치다. 백치로 해서 나는 사물을 들여다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을 기록하는 버릇을 가졌고 그리고 글에 대한 애착을 키웠다. 고맙다.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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