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의거
개설
3·15의거는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일어난 시위로 4·19혁명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 현대사에 있어 최초의 민주·민족운동이다.
역사적 배경
이승만 정권은 1954년 영구집권을 위한 ‘사사오입개헌’을 단행한 데 이어 1956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민주당의 장면 이 당선되자 국민·야당·언론 등 사회 전반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여 나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에서의 불법선거 자행과 더불어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법 등을 개악(改惡)하여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법적 기초를 더욱 강화하였다. 이후에도 이러한 독재정치가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선거는 전국적인 범위에서 광범위한 부정선거로 얼룩지게 되었다. 이에 마산·창원 지역민들의 불만이 대대적으로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발단
선거 당일 번호표가 나오지 않아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속출한 데 이어 민주당의 투표참관인 다수가 참관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등 부정선거의 정황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민주당 마산시당이 오전 10시 30분경 선거포기를 선언하고 투표소에 배치되었던 민주당 참관인들을 모두 철수시키는 한편 곧바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경과
- 11차 의거
- 3월 15일 오후 3시 30분경 민주당 마산시 당원 20여 명과 1천여 명의 시민·학생들이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며 남성동파출소-부림시장-오동동-수성동-어업조합-불종거리로 행진했으나 오후 5시경 경찰이 소방차량을 동원하여 빨간 물을 뿜어대기 시작하자 일시 해산하였다.
- 이어 오후 6시경에는 개표가 진행될 예정이었던 마산시청 앞에 모인 군중들에 의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다시 전개되기 시작하여 순식간에 마산·창원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경찰의 강경 탄압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파출소 공격과 경찰들의 총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창원 지역에서는 시민들이 창원군청을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날 밤의 시위로 모두 8명의 사망자와 123명의 총상자가 발생하였다.
- 22차 의거(4월 11일~13일)
- 1차 의거가 발생한 지 27일 만인 4월 11일 오전 10경 1차 의거 당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눈에 맞고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발견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한 시민들이 시신이 안치된 도립병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경찰서, 5개 파출소, 도립병원 등을 돌면서 다시 시위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 다음 날인 4월 12일에는 마산 지역의 고등학교 학생들도 시위를 전개하였다. 오전 10시경 마산공업고등학교 학생 500여 명이 ‘민주정치 되살리자’며 거리로 나선 데 이어 창신고등학교, 마산여자고등학교, 마산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여 시가행진을 하다 김주열의 주검 앞에 묵념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 후 오후 7시경에 이르자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마산시청을 점령하고 경찰서와 파출소를 공격했으며 시위는 13일에도 계속 이어졌다. 창원 지역에서도 창원군청 일대를 중심으로 시위가 전개되었다.
결과
1·2차에 걸친 마산·창원 지역의 시위는 4월 15일 이후로 전국 각지의 청년, 학생, 시민들의 크고 작은 시위를 촉발하여 마침내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킨 4·19혁명으로 이어지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출처]디지털창원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