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저수지는 오랜 세월 동안 홍수로 인해 낙동강 중하류에 범람원(汎濫原 : flood plain)이 발달하면서 형성된 크고 작은 배후습지(背後濕地) 또는 범람호(氾濫湖)에서 그 생성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약 7만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계속된 신생대 제4기의 최종 빙하기 중 최성기였던 1만8천여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약 100m정도 낮았다. 이 때에는 황해 및 동중국해의 대부분이 육지화하여 한반도와 중국, 일본열도가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수면이 하강할 때에는 위치에너지가 커져 하천의 하방침식력(하천 바닥 쪽으로 깎아내는 힘)이 증가하여 대산평야 지역은 최소한 100m에 가까운 골짜기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점차 기온이 상승하면서 약 6,000년 전에는 해수면이 현재의 높이에 도달하면서(신석기 시대의 해수면 상승 당시에는 낙동강 하류역은 물론 청도천과 밀양천 등의 낙동강 지류역까지 바닷물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대산평야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천은 침식력이 약화되고 퇴적력이 강화되어 하류지역부터 범람원이 발달하게 되었다. 이 때 형성된 것이 낙동강 좌우의 대산평야와 하남평야이다. 그래서 대산평야는 전형적인 범람원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범람원은 홍수 때 하천수가 넘쳐 범람하는 범위의 평야로서, 홍수시 운반된 물질이 하천 양안에 퇴적되어 형성된 낮고 평탄한 지형을 말한다. 주로 10년 주기로 일어나는 홍수의 범위와 일치한다. 그리고 범람원이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지형이 자연제방, 배후습지, 자유곡류하천 등이다. 주남저수지도 바로 이 배후습지의 일부에 해당한다.
범람원인 대산평야에는 범람원이 만들어내는 세 가지 주요 지형요소를 볼 수 있다. 하천이 범람하면서 양안에 비교적 높게 퇴적된 부분을 자연제방(自然堤防)이라고 하는데, 가는 모래를 중심으로 퇴적물질의 입자가 비교적 굵고 배수가 양호하여 취락이 입지(열촌 : 列村)하거나 밭, 과수원, 교통로 등으로 이용된다.
약 8~12m의 해발고도를 보이는 대산면 갈전리-일동리-신성리-모산리-북부리-유등리로 이어지는 지역으로서, 초기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이 비교적 일찍 형성된 곳이다. 이들 지역은 지금도 마을 주변에 밭과 과수원이 우세하고 비옥한 토양과 양호한 배수를 이용하여 시설농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범람한 하천수가 자연제방 뒤쪽 내륙으로 흘러들어 주변의 구릉지와 만나는 곳에서 드디어 흐름을 멈추고 호소와 늪을 형성하는데, 이를 배후습지라고 한다.
이 곳은 실트(silt), 진흙(clay) 등과 같은 입자가 가는 점토로 이루어져 배수가 불량하다.(요즘도 주남저수지 제방 인근에서 고령토 채취가 가끔 이루어지고 있다.) 홍수시 침수가 잘 되고 저습한 늪지 형태를 이루지만 인공제방을 축조하고 배수시설을 설치하여 논으로 개간하여 활용한다.
대방-용산-주남-고등포-남백-진영-용등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가장 낮은 주남과 금산리 앞은 해발고도가 2~4m에 불과하다.
주남저수지 일원에 제방이 쌓이기 전인 1920년 지도를 보면 자연제방과 배후습지의 경계인 노연-대방-가촌-가술-제동-우암-용등-주천강까지 일본인이 설립한 촌정농장이 주도하여 촌정제방을 가장 먼저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주남저수지 일원은 홍수에 이은 범람 시 가장 먼저 물이 차고 가장 나중에 물이 빠지는 지대가 가장 낮은 저습지였는 바, 촌정농장의 주도로 주민들을 동원하여 주남저수지 제방을 쌓으므로서 촌정제방과 주남저수지제방 사이의 배후습지는 수리안전답이 되었으며 곡창지대로 변모하였다.
이외에도 주천강과 같이 구불구불하게 흐르는(지금은 직강공사로 자유곡류천은 흔적만 남아 있음) 자유곡류천도 범람원의 특징적인 지형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