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풍경

영화연구가 이승기 선생님 방문(11.26)

등록일 :
2020-03-05 03:50:32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387

영화연구가 이승기 선생님

영화연구가 이승기 선생님

[사진 해설]

우리 지역 영화 연구가 이승기 선생님이 방문하셨습니다.
특별기획전 <7080 마산의 문학동인전>에 전시되었던 강남극장 사진을 보시고, 그 사진의 연도에 대해서 확인을 하시고자 방문하신 것입니다. 영화에 관한 작은 단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 선생님의 열정이 놀라웠습니다. 이승기 선생님은 마산문화원에서 2009년도에 <마산영화 100년>이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펴내셨습니다.

"책을 내기위해 직접 발로 뛰며 인터뷰하고 함께 답사를 한 인물들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제일여고 전 이사장, 전 민주평통 손춘수 부의장, 마산문화원 정성자 부원장, 마산예총 정연규 사무국장 등 수십명의 도움과 열정으로 집필된 '마산영화 100년'은 분명 이제 까지 보기 힘들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평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라고 당시 <<여성신문 >> 기사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사보이호텔에서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은 “ 이번에 발간된 마산영화 100년 자료집은 사라져 가는 마산의 영화자료는 물론 과거의 여가와 사회적 분위기를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값진 역사기록물 으로서 출판의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승기 선생님의 강연 자료 중에서 우리 지역의 영화 역사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산 최초의 영화 상영과 극장 희락좌
마산의 영화 역사는 우리나라 전체를 볼 때 매우 빠른 편이다. 마산은 1899년 5월 1일 국제무역항으로 개항하였다. 일본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까닭에 마산은 부산과 더불어 근대문물이 매우 일찍 전파되었고 영화도 타 지역에 비해 일찍 소개되었다.
일제시대의 신문을 살펴 보면 우리 나라에서 영화 상영은 서울보다는 부산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필름은 대부분 마산과 진해, 진주, 통영을 거처 대구, 대전, 경성, 평양, 원산 등 한반도 북서부로 옮겨갔다. 비록 마산이 영화 상영의 중심지는 아닐지라도 중요한 거점 도시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마산에서 최초로 영화가 상영된 것은 서성동 해안가의 숯창고에서 상영된 오사카 대화재 다큐멘타리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으며 1905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대가 확인된 가장 오랜 기록은 1913년경 일본 실업인 하사마의 창고 앞(현 경남은행 창동지점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왕 즉위식 기록영화 상영이다.
마산 최초의 근대식 극장은 두월동에 있던 〈희락좌(喜樂座)〉이다. 1906년 중순 개관하여 일본인 전용 가부키 극장으로 운영되다가 1907년 2월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다. 희락좌는 일본의 전통극장과 동일하게 운영되었다고 하니, 만담, 연극, 민요, 줄타기 곡예, 스모, 비파 연주 등이 공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마산 최초의 극장 환서좌
마산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상영하였던 극장은 〈환서좌(丸西座)〉이다. 물론 근대식 극장으로는 앞서 소개한 〈희락좌〉가 있다. 하지만 이 극장이 일본인들만 출입 가능한 순수한 가부키 공연장이었다면 극장이라기보다 실내 공연장 정도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더욱이 희락좌에서 영화를 상영하였다는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환서좌를 마산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환서좌는 신창동 제일신마산교회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1907년 건설되었다. 일본식 2층 목조 건물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회전무대를 갖추고 있었고, 관객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큰 규모의 극장이었다. 경영자는 일본인 나카무라 쵸우였고, 가부키를 비롯한 일본 전통물을 중심으로 월 12회 공연했다. 관객의 대부분은 일본인이었다. 전통 공연 외에도 각종 연설회 및 연예 흥행, 영화상영을 했는데, 비어있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니 큰 성황을 이룬 것 같다. 1930년대 초반 여러 차례 영화를 상영한 기록이 있으며, 특히 발성영화도 상영되었다고 하니 음향시설도 구비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1930년 이후 폐관하였다. 정확한 폐관년도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3. 구마산의 수좌
환서좌 개관 10년 후인 1917년경 수성동 신정탕 자리에 〈수좌(壽座)〉가 개관하였다. 조선인 유지들이 출자하여 건설했으며, 조선인의 출입이 자유로워 큰 인기를 끌었다. 각종 회의, 연쇄극, 영화 등이 끊일 새 없이 상영되었으며, 이익도 많아 출자들에게 돌아간 배당액이 연 10할을 초과하였다고 한다.
1921년 위생계몽영화 상영을 비롯하여, 1923년 「춘향전」상영회, 1929년에는 춘사 나운규가 참석한 영화상영회 개최 등 많은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 외에도 경남기자대회(1925), 마산 최초의 근대연극단체 극예사(劇藝舍) 창립공연(1932), 윤심덕, 최승희의 마산 공연 등 수많은 강연회와 웅변대회, 연극, 음악회가 수좌에서 개최되었다. 1933-35년 경 폐관했다.

4. 가부키 극장 도좌의 변모, 마산좌를 거쳐 마산극장으로
이후 중앙동에 〈도좌(都座)〉가 개관했다. 개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0년대 초반으로 추정한다. 도좌는 현 중앙동 1가에 건설된 객석 300석 규모의 소규모 극장으로, 위치가 편리하여 수시로 소극이나 활동연쇄극, 만담 공연, 꽃꽂이 진열 등의 행사가 열렸다고 한다.
1926년 9월에는 일본 실업가 혼다가 이 극장을 인수하여 대폭 개수를 한 후 〈마산좌〉라는 이름으로 재개관했다. 객석이 450석으로 확장되었고, 통풍과 채광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곧바로 〈마산극장〉으로 재개명을 하여, 마산좌라는 이름은 한 해를 못 넘긴 것으로 본다. 〈마산극장〉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존속되었고, 1980년대 폐관될 때까지 50년 가까이 운영되었다.


5. 마산민의소에서 마산구락부회관, 공략관
얼마 전까지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은 1908년 마산민의소(馬山民議所)가 설립한 공회당(公會堂)이 시작이다. 일제시대 마산시민의 대의기관인 마산민의소가 1908년 시민극장 자리에 건립되었고 그 건물의 이름을 공회당(公會堂)이라고 했다. 마산 민의소는 구마산 지역의 해안 매축권을 둘러싸고 한일 간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기에 우리나라의 권익을 위해 설립된 자치단체였다.
1914년 일제에 의해 민의소가 강제 해산된 후 버려져 있던 공회당은 마산구락부(馬山俱樂部)에 의해 시민교육과 강연, 공연행사 등에 이용되었다. 흔히 마산문예구락부로 이름이 알려진 이 단체는 일제하 마산에서 관여하지 않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방대한 사업을 벌여온 단체였다. 각종 강연회나 교육, 문학행사, 공연 뿐만 아니라 체육행사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마산구락부회관으로 사용되던 공회당은 1935년 마산부의원이며 실업가이던 일본인 혼다 쓰찌고로우(本田槌五郞)에게 비밀리에 강제 매각되어 2층 콘크리트 구조의 극장 〈공락관(共樂館)〉으로 변모하였다. 공락관에서는 「킹오브킹」(1936)을 비롯한 많은 영화가 상영되었다. 해방 이후 〈시민극장〉으로 개명되었는데, 1995년 폐관할 때까지 근 100년 가까운 세월을 마산 창동에 남아 있었다.

6. 신마산의 앵관, 제일극장
〈앵관(櫻館)〉은 해방 이전 건설된 극장 중에서 유일하게 정확한 개관일이 확인되는 극장이다. 앵관은 마산연예주식회사에서 1932년 11월부터 두월동에서 건설을 시작하였다. 약 6개월간의 공사 후 1933년 5월 13일 개관식을 올리고 공연을 시작하였다.
앵관은 2층 석조건물로 객석은 다다미로 되어 있었다. 시내와 좀 떨어진 관계로 초기 운영에 곤란을 겪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용가 최승희의 공연을 비롯한 굵직한 행사가 많이 열렸고, 이런 공연 때에는 관객이 가득 들었다고 한다. 앵관은 해방 후 〈제일극장〉으로 개명하였고, 1970년대 중반까지 운영되었다.

7. 현대의 극장 I - 시민극장에서 신태양극장까지
해방 이후 마산에는 수십개의 극장이 생겨났다가 없어졌다. 해방 직후에는 일제시대 때 운영되던 앵관, 공락관이 각각 제일극장, 시민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어 운영되었고 마산극장은 이름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영업을 재개하였다. 그러다가 1947년 부림극장을 시작으로 새로운 극장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고 이 극장들은 간혹 이름이 바뀌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이 되었다.

▷ 제일극장
일제시대 앵관은 해방 후 제일극장으로 이름이 바꾸었다. 쇼, 악극단, 영화상영, 그리고 마산예술제 행사 행사를 개최하였다. 외화 「해벽」,「죄없는 미모」, 「공포의 거리」, 「남국의 정열」을 이 극장에서 감상하였다. 1970년 이후 폐관되었고, 그 후 4층 건물로 신축되어 지금은 제일각 식당으로 변하였고 옛날 극장 모습은 찾을 수 없다.

▷ 시민극장
일제시대 공락관은 1945년 해방이 되자 박세봉이 인수하여 1946년 3월 29일, 시민극장이란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스크린이 커서 세계 최초의 시네마스코프영화인 「성의(聖衣)」가 상영되기도 했다. 1995년 7월 27일, 「브레이브 하트」 상영을 마지막으로 기나긴 역사의 문을 닫았다.

▷ 마산극장
마산극장은 일제시대 때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많은 영화와 연극, 쇼, 노래자랑대회가 마산극장 무대에 올랐다. 연극계의 기인 추송웅의 「빨간 피이터의 고백」 순회공연도 이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1980년 이후 폐관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대형빌딩이 신축되어 영원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부림극장에서 국제극장, 강남극장으로
부림(富林)극장은 해방 이후에 생긴 최초의 신설 극장이었다. 1947년 8월 1일 부림동 83번지에 개관했는데, 당시 신문에는 철도 레일을 불하받아 극장 기초공사를 했고 국내에서 튼튼한 건물로 손꼽힌다는 기사가 난 적도 있었다. 1950년 1월, 잠시 문을 닫았던 부림극장은 영사기를 설치하고 명실상부한 영화관으로 탈바꿈하여 재개관했다.
무대가 넓어서 각종 쇼 무대로도 사용되었는데, 극장 3층에 순회 중인 악극단 단원을 위한 숙소를 마련했다고 하니 당시로선 상당한 규모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6·25전쟁으로 잠시 재휴관했던 극장은 1951년 말부터 영업을 재개했고, 1953년경 이름을 〈국제극장〉으로 바꾸었다. 1956년에는 다시 〈강남극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필자가 이 시기에 국제극장과 강남극장을 모두 다 갔었는데 시설 면에서 바뀐 것은 없었다. 이름만 새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넓은 무대, 안락한 의자는 마산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2000년에 강남극장은 기존의 1, 2층을 분리시켜 1관, 2관으로 대폭 수리하여 재개관하였다. 개관작으로 「비천무」를 선정하고 새롭게 출발했지만 고전하다가 2004년 8월 말,「바람의 파이터」상영을 마지막으로 폐관되었다. 2008년 11월에 건물마저 완전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동보극장과 스카라극장, 대한극장
동보극장은 1958년 1월 23일, 마산시 오동동 옛 고려모직 앞에서 개관하였다. 재개봉관으로 출발한 동보극장은 창고극장이었고 특이하게도 좌석은 공원벤치 같은 의자였다. 하지만 입장료가 저렴하여 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었다.
1970년 이후 폐관되었고 그 자리에 나이트클럽이 들어서 한동안 성업을 했다. 1990년 5월 12일에 똑같은 자리에서 다시 극장을 개업을 했는데, 이번에는 이름을 스카라 극장으로 바꾸었다. 개관작품은 홍콩영화 「길성고조」, 주윤발과 장애가가 주연한 로맨스 코미디였다. 스카라 극장에서는 「말콤 X」, 「시네마 천국」 같은 명작도 상영하였다. 이후 대한극장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지만 결국 문을 닫았고 지금은 흔적 도 찾아보기 힘들다.

▷ 자유극장, 중앙극장
마산시 추산동 19번지에 있던 〈자유극장〉은 1958년 경 술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재개봉관이었다. 1961년 7월, 단 5일간의 확장공사를 거처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다시 문을 열었다. 단층으로 된 극장이었지만 영사실은 2층에 있었고, 연속 상영이 끝나고 나면 여름 철에는 왼쪽 천장의 문을 걷어내어 환기를 시켰는데 푸른 하늘이 보였다. 대부분의 상영작이 외국 영화였는데, 넓고 깊은 무대 덕분에 쇼 무대로도 종종 활용이 되었다.
1999년 6월에는 연흥극장에서 임대하여 〈연흥5관〉으로 극장 이름이 바뀌었으나 얼마가지 않았고 곧 중앙극장으로 원상 복귀하였다. 연흥극장의 일방독주, 그 후 합성동의 멀티플렉스 극장의 개관으로 인한 관객의 감소로 고전하다가 2003년 12월 31일 「반지의 제왕 3편」의 상영을 끝으로 폐관하였으며, 지금 그 자리는 중앙가구점이 자리잡고 있다.

▷ 3·15 기념관과 극장 3·15 회관
1962년 마산시는  3·15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서성동에 기념관을 건설하고 9월 20일 기념관 개막식과 기념탑 제막식을 함께 거행하였다. 다음 해인 1963년 4월 24일, 영화전용 상영관으로 바뀌면서 건물의 명칭도 3·15 회관으로 개칭되었다. 그런데 이 건물이 비록 영화관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엄연히 그 경영권이 시장에게 있는 시립극장이었다. 당시로서는 대단히 드문 경우라고 하겠다.
개관 초기에는 외화전문 상영관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외화를 중심으로 상영하였는데, 인기 있는 작품을 잘 선정하여 관객들이 많았다. 게다가 서성동 시외버스터미널이 극장 맞은 편에 자리한 덕분에 언제나 관객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80년대초 시외버스 터미널이 합성동으로 이전하면서 주변에 형성되어 있던 상가마저도 모두 이전을 하는 바람에 관객의 급감을 겪게 된다. 90년대 초반에는 바로 인근 부림동에 연흥극장이 개관되면서 운영상의 애로가 심해졌다. 1995년 「벤허」 재상영 후 폐관되었고, 2005년 4월 6일 철거되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그 장소에는 2007년 마산노인종합복지회관이 건립되어 개관되었다.

▷ 태양극장과 신태양극장
마산시 상남동 101번지에 자리 잡았던 980석의 이 극장은 1970년 7월 20일 「두여인의 집」을 개관프로로 시작해서 1989년 9월 24일 홍콩영화 「영환소저」, 「비룡문」의 2본 동시상영을 끝으로 헐리고 말았다. 이 극장의 가장 큰 특징은 2본 동시상영이었다. 1930~40년도에 미국에서 시작된 이 상영방식은 입장료를 한 번 받고 2편의 영화를 시간대별로 상영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B급 작품이 먼저 시작되고 A급 작품이 마지막 상영에 배치되었다. 
1989년 문을 닫은 태양극장은 1991년 5월 18일 신축 개관하였는데 명칭이 〈신태양 시네마 볼링센터〉였다. 기존의 극장을 신축하여 멀티플렉스관 같은 형태로 신축하였으나 프로그램 공급 등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1999년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지금은 용도로 변경되어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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