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풍경

이극로 선생 조카 장철홍 님 방문(12.25.수)

등록일 :
2020-03-05 03:35:33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211

이극로 선생 조카 장철홍 님

이극로 선생 조카 장철홍 님

[사진 해설]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 사전을 만드는 내용을 다룬 영화 <말모이>로 널리 알려진 이극로 선생의 조카 장철홍님이 방문을 하셨습니다.
교방동(2019년 당시 노산동)에 거주하고 계시고, 모친은 이극로 선생의 여동생으로 두곡댁으로 불리웠습니다.

"정말 대단하신 분이셨지"
장철홍 님은 외삼촌 이극로에 대해서 이렇게 말문을 열며 시작하셨습니다.
한동안 자료 속에서만 만나던 이극로 선생의 가족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극로 선생의 고향은 의령으로, 노비산 인근에 있는 창신학교(현재의 제일문창교회)를 졸업하였습니다.
창신학교는 일제강점기 때 민족교육을 했던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차민기 님의 <나라 잃은 시기 마산 지역의 민족교육-창신학교의 한글교육을 중심으로>에서는 창신학교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당시 마산의 사회적 분위기는, 일인들의 수탈에 대항하여 민족의 생존권을 보호하고, 우리의 삶터에 대한 주도권을 자주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민족단결의 구심점을 필요로 하던 때였다. 1906년 5월 17일에 10여 명의 아동들로 시작한 창신학교의 전신 ‘창신’(昌信)이라는 교명을 처음 정한 것은 1908년의 일이었고, 정규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은 것은 1909년의 일이었다. -창신90년사 편찬위원회, 『창신90년사』.
이, 몇 년 사이에 인근 지역에서까지 몰려드는 학생들로 인해 교사를 확장하고, 민족주의 활동을 뚜렷이 하거나 그러한 의식을 분명히 지닌 교원을 충원해야 했던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바탕 위에서 아래 글을 읽어보면 당시 창신학교의 분위기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의 교육목적은 교육을 통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을 배양하고, 우리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뜨거운 민족의식이 고취에 있었다. 따라서, 당시에 사용된 교과서는 대부분이 애국심 고취를 내용으로 한 것이었으며, 교정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리었고, 모든 모임에서 애국가가 불리워졌다. 또한, 조례의 훈화도 애국정신에 넘쳐 흘렀으며, 토론회·강연회와 같은 교내외 활동에서도 정부를 공박하고 일본의 검은 손길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이와 아울러, 학생들의 체력훈련을 특별히 강조하여 건강한 신체가 곧 외세를 이겨 내는 힘의 근원이라고 가르치는 한편, 학생들에게 엄격한 병식(兵式)체조를 부과하여 절도 있는 생활과 건강한 체력을 연마하게 하였다. 박명윤, 앞의 글, 34쪽.


이처럼 이 시기의 창신학교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교육기관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창신학교에 고등과가 설치된 것은 1912년의 일이고, 만연된 봉건주의 가치관으로 인해 남녀공학을 포기하고 창신의 여학생 26명으로 ‘의신여학교’를 따로 만든 것이 1913년 4월의 일이다. 당시 의신여학교는 창신학교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동래 일신여학교에 이어 경남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학교가 되었다.
-박명윤, 앞의 글, 33쪽. 
 1915년 3월 22일에는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이때 졸업생들 대부분은 인근 지역의 교원으로 임용되어 창신학교의 민족주의적 학풍은 점차 인근 지역으로까지 확산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은 1919년 마산의 ‘기미만세의거’에서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그 중심적 역할을 한 사실로 증명된다.
당시 마산에서의 만세의거는 세 축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국내 독립운동단체인 대동청년단의 단원이었던 김관제의 축이 하나였고, 창신학교 부교장 이상소와 교사 임학찬의 축이 또 하나, 의신여학교 교사 박순천이 이룬 축이 나머지 하나였다. 임학찬은 창신학교 등사기를 빌려와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 수천 매를 등사하고, 박순천은 의신학교 여학생들과 더불어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1919년 3월 21일에 이르러, 의신여학교 학생들이 만든 태극기는 창신학교 남학생들의 품에 전달되었고, 창신학교에서 만들어진 독립선언서는 의신여학교 여학생들의 치마폭에 감추어졌다. 이날 정오 마산역의 기적소리를 신호로 마산 전역은 순식간에 “대한독립만세!”의 함성으로 뒤덮혔다. 박순천, 김순, 팽삼진 등의 교사와 남녀학생들은 품어 감추었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 속에 마구 뿌리며 분위기를 주도했다. 박명윤, 앞의 글, 41~43쪽.
 이때 모여든 군중이 3천을 헤아렸는데, 당시 마산의 인구가 1만 5천여 명이었음을 생각하면 실로 엄청난 숫자라 할 만하다. 
이렇게 만세 운동이 있고 난 이듬해인 1920년 신학기에, 창신학교의 신입생 수는 전년 79명에서 246명으로 급격히 늘어난다. 이는 기미년의 만세 운동에서 창신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보여주었던 민족적 활약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되는 부분이다.
이 시기 창신학교가 지닌, 민족주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면모는 또 다른 분야에서도 드러난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가운데 하나는 비밀결사운동이었다. 마산에서도 이러한 비밀결사운동을 위한 조직이 만들어지는데, 여기에는 자본가와 교육자, 기독교인과 청년회가 한데 어우러져, 마산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창신학교 교사이면서 뒷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국학자가 된 안확은, 이 당시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을 맡고 있으면서, 삼진의거 때는 일본주재소를 습격한 혐의로 수배되기도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제8권, ‘국권회복단Ⅱ’, 109쪽.
 또 같은 때에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을 보면,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교사로 있던 이윤재, 김윤경, 이무상 이무상은 1918년 3월까지 창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재직 시절 안확과 교분을 맺었고, 이후 자산과 함께 여러 단체에서 민족주의 활동을 주도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참조.
, 임학찬 들이 있었다. 특히 창신학교에서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친 바 있는 김윤경은, 1911년에 마산교회의 청년조직인 공려청년회(共勵靑年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귀원, 앞의 글, 10쪽.
 이들은 한일병합으로 인해 모든 국권이 상실되었던 때에 우리 지역의 항일 구심처로 기능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마산에서의 ‘기미만세의거’는 지역민의 의분이 결집력 있게 분출될 수 있었다. 
기미만세의거가 끝난 직후인 1920년대 마산에는 ‘문화운동’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문화운동’이란 실업과 교육의 장려를 맨 앞자리에 내세워 회사와 학교를 설립하고 확충하면서, 대중을 조직화하는 한편, 강연회와 토론회를 통해 민족의식과 서구적 근대의식을 널리 깨우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학교 시설만 들추어 보면 마산공립상업학교(1920년 설립), 마산학원(1920년 설립), 배달학원(1921년 설립), 월영노동야학교(1921년 설립) 등을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극로 선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 이극로(李克魯, 호는 고루, 또는 물불 : 1893. 8. 28 ~ 1978. 9. 13) 

이극로는 경남 의령에서 나고 자랐다. 농촌의 막막한 생활이 싫어 16세에 가출하여 무작정 창신학교에 몸을 부렸다. 1910년의 일이었고, 자산이 교사로 일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부모나 친지의 학비 지원도 없이 혼자서 허드렛일과 날품팔이로 겨우 생계를 꾸렸다. 이극로의 호가 물불이 된 것은 이 창신학교 때의 일이다.

낙동강변으로 소풍을 갔던 이극로는 (일본계) 교사로부터, “조선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조선 청년의 용기가 부족해서”라는 훈시를 듣고 격분하여 그대로 강물에 뛰어들어 용기있음을 분명히 보였다. 이때부터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하여 ‘물불’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다. 이종무 회고, 1997. 4. 20. 면담하고 채록함.

이극로의 개인적 기질로 보아 넘길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 창신학교의 학풍도 짐작해 볼 만한 일이다. 
창신학교에서 2년의 수학을 마친 이극로는 만주로의 먼 유학길에 올랐고, 대종교 그때에 대종교는 국내외 광복 활동과 더불어 우리말글 교육에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김두봉, 김윤경, 류렬, 안자산, 안호상, 이극로, 이병기, 이윤재, 이은상, 이희승, 장지연, 주시경, 최현배, 현진건, 홍명희 등이 모두 대종교에 관계된 이들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종교의 광복 활동에 맞추어 우리말글 교육을 짚어낸 성과물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모으고 힘을 쏟을 일이다.
가 주관하여 설립한 동창학교에서 처음 교편을 잡게 된다. 여기서 그는 주시경의 계승자로 꼽히는 김두봉과 교류 ‘이동휘-김원봉-김두봉-이극로-이우식-안희제’ 등은 이 시기 직접적으로 상관관계에 있던 이들이다. 활동 분야가 다르고 이념을 달리했던 이들이 이 시기에 어떤 공통 분모를 지니는가를 밝히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라 여긴다.
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한글 연구에 눈길을 두었다. 그는 다시 독일로 건너가 1922년 베를린 대학 철학부에 입학하는데 여기서 ‘언어학’을 부과로 이수하였다. 1927년 베를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이듬해에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정치와 경제학을, 또 그 다음해에는 프랑스 파리대학에서 음성학을 공부했다. 언어학에 대한 이러한 열정과 유학 경험은 귀국 후에 자연스레 ‘조선어연구’로 이어졌고, 1929년에 들어서 조선어연구회를 재정비하여 ‘조선어학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을 벌여나갔다. 그러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이 발생하여 사전편찬 사업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뒤에야 비로소 사전이 출판되었다. 
광복 이전부터 교육을 중시했던 이극로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에 ‘조선소년 운동 중앙 협의회’ 결성식에서 초등교육에서 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가 하면, 1947년에는 ‘교육조선건설론’이라는 글을 통해 각 과정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기획안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가 정신을 가다듬고 한마음으로 나아가면 당당한 독립국가로 세계에 비견할 수 있음은 틀림없다”라고 하면서, “이러한 굳은 자긍심과 자각을 길러 줌이 교육의 제일보다”라는 말로 ‘자주 정신의 배양’을 강조했다. 또한 이 글은 교육에 대한 그의 안목을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가운데 몇을 들어보면, “국가는 전국민에게 국민생활에 필요한 완전한 교육을 책임지고 수행하여 주어야 한다”라고 하면서, ‘8년 또는 10년의 의무교육’을 주장하였다. 즉 “초등과 6년 내지 8년을 종료한 후 고등부문에 진학하려는 자는 중학에 들어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만일 조속히 실무에 나가려는 자에 대하여는 반드시 2년이나 3년의 실업과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한글사업과 교육철학을 통해 한국의 근대 교육의 바탕을 다지고자 한 이극로는 1948년 4월 건민회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그대로 북에 남아 생을 마쳤다. 나라 잃은 시기 한글 사업을 통해 민족교육의 큰 바탕을 이루었음에도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여전히 낯설다. 심지어 조선어학회의 책임자가 그였다는 사실조차 거의 알려지지 못했다. 월북의 전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랜 세월 반공의 이데올로기가 그를 이토록 철저히 지워놓았다. 연구의 자리에만이라도 수시로 그의 이름을 들추어내어 그가 남긴 업적을 분명히 해야 할 일이다. 이극로의 생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이 보다 자세히 다루고 있다."

* 종종 오시겠다는 말씀을 남기고 장철홍 님은 노비산 아래로 향하셨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나머지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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