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자료

정진업 시인 소장품 (74년 삽화)

등록일 :
2020-05-11 07:52:05
작성자 :
문화예술과(055-225-7193)
조회수 :
82

정진업 시인 소장 삽화 (1974년)

정진업 시인 소장 삽화 (1974년)

[자료 해설]

1. 자료 소개
해당 자료정진업 시인이 잡지사 편집일에 관여하고 있을 때 받은 소설의 삽화입니다.
"74"라는 표기가 삽화에 저자의 사인과 같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74년도에 출판된 책자에 실린 삽화로 여겨집니다.
제일 첫 장면이 바닷가인점을 보면 당시 마산항의 풍경을 스케치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정진업 시인 본인의 작품은 아니지만 당대의 시대적 분위기와 마산항의 모습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여겨집니다.

2. 정진업 시인 소개 
정진업 시인은 우리 지역 문단의 중심적인 인물로 다양한 문학 방면에서 활동했으며 연극인으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대략적인 연보는 아래와 같습니다.

=========  아 래 ==========
정진업은 1916년 4월 19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동래(東萊), 호는 월초(月礁, 月艸). 1930년김해보통학교(현 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34년에 졸업했다.

1936년 무렵 이광래가 이끄는 〈극예사〉와 〈황금좌〉 같은 연극단체에 들어 연극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5월 『문장』지에 단편소설 「카츄사에게」로 이태준의 추천을 받았다. 1940년평양숭실전문학교 문과에 잠시 다녔으며, 통영 협성상업학원(현 통영제일고등학교)에서 연극을 가르치기도 했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마산 〈공락관〉에서 「강씨일가」를 연출하고 주연을 맡았다. 1947년『경남교육』 편집부장으로 일했으며, 1948년『부산일보』 초대 문화부장으로 근무하며 경남ㆍ부산 지역에서 연극인으로,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8년 첫 시집 『풍장』을 시문학사에서, 1953년 두 번째 시집 『김해평야』를 남광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50년 8월 좌익계 문화단체원으로 몰려 투옥되어 6개월간 고초를 겪다 부산일보에서 해임되었다.

1951년 거제 하청중학교 국어교사를 시작으로 하청고등학교, 부산 항도고등학교,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에서 근무했다. 1951년수도육군병원에서 주관한 영화 「3천만의 꽃다발」을 마지막으로 배우활동을 청산했다.

1967년 문협 마산지부장을 역임했다. 1971년 세 번째 시집인 『정진업 작품집(1)』과 산문집인 『정진업 작품집(2)』를 신조문화사에서 간행했다. 1976년 네 번째 시집 『불사의 변』을 시문학사에서 간행하였으며, 1981년 다섯 번째 시집 『아무리 세월이 어려워도』를 해조문화사에서 펴냈다.

한편 허버트 리드가 쓴 『시와 아나키즘』(형설출판사, 1983)을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1983년 3월 28일 타계했다

* 자료 출처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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