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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합포구청

연혁 및 특성

연혁

  • 구산면은 신라때 성법부곡이라 불렀으며, 고려에 와서 구산현으로 승격. 공양왕 때 칠원현에 속함.
  • 조선 고종 32년(1895년) 칠원군 구산면이라 칭하였으나, 1908년 칙령 제69호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가 1910년 다시 마산부에 편입되고 1914년 다시 창원군에 이속.
  • 1973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예곡, 우산, 현동, 덕동 4개리는 마산시에 편입되, 수정, 유산, 마전, 석곡, 옥계, 반동, 구복, 심리, 남포, 내포등의 10개리는 창원군 관할에 둠.
  • 1995.01.01. : 시·군 통합으로 마산시에 편입되어 합포구 구산면이 됨.
  • 1998.12.18. : 대지 면적 3,479.6㎡, 연면적 1,178.48㎡, 지상 3층, 부속 건물 1개소 규모로 구산면사무소 신축.
  • 2001.01.01. : 마산시 조례 제425호 구청제 폐지로 마산시 구산면으로 개칭
  • 2010.07.01. : 창원·마산·진해의 3개시가 하나로 통합하여 창원시로 출범함에 따라 창원시 마산합포구 구산면으로 변경.

특성

  • 구산면은 마산합포구의 남쪽으로 돌출된 만에 자리잡고 있음.
  • 면의 동쪽으로는 마산만과 진해만이 있고, 서쪽으로도 만이 발달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남해가 펼쳐지며 거제도와 마주하고 있음.
  • 동서남의 세 방향으로 저도(猪島)와 실리도(實利島) 등 2개 유인도가 있고, 송아도(松兒島)·소도(小島)·장도(長島)·웅도(熊島)·신도(申島)·쟁도(錚島)·고도(鼓島)·소계도(小鷄島)·계도(鷄島)·부도(缶島)·쇠도(釗島) 등 11개의 무인도가 있음.

유래

구산면은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산세가 대체적으로 거북이 같은 형태를 하고 흡사 거북이가 바다에 들어가는 형국이므로 거북이 구, 뫼 산이라 이름 지어졌다.

[구산면 마을지명 유래]
유산(柳山)리

마을앞을 흐르는 냇가에 버드나무가 茂盛했기에 이름을 柳山이라 지었다고 한다. 윗 유산은 산세가 좋았던지 거기 집단 해 살던 尹氏門에서 漆原郡守가 나셨다. 아래 유산을 柳川이라고 한다. 윗 마을엔 漆原尹氏, 尙州周氏가 아래 마을엔 慶州崔氏, 仁同張氏가 대표되는 성씨로 거주하고 있다.

마전(麻田)리

마전은 글자 그대로 삼밭이다.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오목하게 산으로 둘러싸인 盆地로 되어 있어 바람세가 적고, 땅이 기름져 예부터 삼을 많이 심어 주 생업으로 했음으로 麻田이라 이름 하였다. 이 마을엔 이씨가 입주하기 전에는 신녕여씨가 임란 전에 들어와서 제법 잘 산 것 같다는 전언이다. 그것을 증명할만한 것은 마을 북쪽의 벌판에서 기와, 토기, 도기 등의 유물이 나오는 것을 보아서이다. 어르신들의 이야기로는 아마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남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자행할 때 인지라 왜구를 피해 모든 재산을 땅에 묻어두고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다. 장군묘가 있다기에 찾았더니 그는 임진왜란 때부터 충무공의 副尉로 있었던 장군으로 丁酉再亂 때 충익공 곽재우 장군과 함께 창녕 火旺山 전투에서 전사하신 함안의 순흥안씨의 묘소였는데 묘비는 하도 오래되어 글자가 마멸되어 史蹟을 알아볼 수 없어 못내 아쉬웠다. 호는 楓灘亭이다. 또 全州李氏 上祖 折衝將軍 묘소도 있다.그리고 마을 앞의 넓은 갯벌은 예부터 鹽田으로 쓰여졌다고 하나 그 역사적인 사실은 알 수 없다.

석곡(石谷)리

마을이 산에 둘러싸였고, 돌이 많은 골짜기에 위치하였음으로 石谷이라 이름 하였다. 예부터 이 마을은 密陽朴氏의 집성촌으로 입구산 정착지로 약300수십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았다. 마을 서쪽 산 밑에 白土가 나왔다고 한다. 일제시대 일본인이 이곳에서 광맥을 발견하여 양질의 백토를 파내어 수정만에서 선편으로 도자기 화장품 원료를 쓰기 위해 일본으로 반출했다고 한다. 광복 후 두, 세차례 채굴에 손을 댔으나 이미 절량으로 폐광하고 말았다. 지하 약 40m까지 파내려 갔으며 지하엔 왠만한 주차장 만큼의 공간이 되어 있다니 일본인이 얼마나 채굴해 갔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명주(明珠)마을

마을 앞 浦口의 잔잔한 바닷물 위에 비춰진 아침 햇살과 저녁놀이 마치 예쁜 구슬을 보는 것 같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 情景을 보고 마을명을 明珠라고 지었다고 함. 마을의 앉은 자리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양지바른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옛날엔 小農으로 생활의 기반을 삼았으나 근래는 수산업 기술의 발달에 따라 垂下式 養殖에 치중하여 옛날과 판이하게 배도 많고 선착장도 잘 만들어져 있는 어촌으로 탈바꿈을 하고 있어 경제력의 향상으로 생계도 대체로 윤택한 것 같다. 주민은 晋陽鄭氏, 達成徐氏, 密陽朴氏가 주로 거주하고 있음.

군령(軍令)마을

아주 옛날의 通信手段이란 도보가 아니면 馬便밖에 없었던 시절 산골짜기에 위치하였으므로 해군에서 전달되는 軍事傳令을 전하던 驛村 역할을 한 곳이므로 軍令이라 한 것 같다. 마을 이름에서 풍기듯이 군사적 사적도 많은 곳인데 앞산 정상에 옛 성터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임진왜란 당시 진해만 일대에 이순신 장군 예하의 수군의 출입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왜적을 유인작전을 써서 전승을 올렸던 史記는 亂中日記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水軍哨所의 역할을 한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마을 뒷 산정에는 壕가 여러 곳에 흔적이 남아 있고 또 성터 밑 들판엔 군창지 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임란을 전후하여 이곳은 진해만의 요새지였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城에서 軍令이 하달되어 육로로 상부에 전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명이 군령으로 된 것으로 추측된다.

수정(水晶)리

앞 바다가 잔잔한 호수와 같고 水晶과 같이 그 물이 맑으므로 水晶이라 이름 하였다.(현재는 약 7만평이 매립되어 앞 바다가 거의 없어지다) 옛날엔 정호개(晶湖浦)라고도 불리었다. 본 면 행정의 중심지로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학교 등의 관공서가 집결되어 있다. (1922년 면사무소가 현동에서 이전됨) 본 마을은 섭동으로 죽전, 안녕, 장문안, 골매를 끼고 있으며 주민의 생업은 어업과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예부터 본동엔 土俗信仰으로 마을의 연례행사의 하나로 매년 음력 정월 열 나흣날 丑時에 事前에 祭官을 嚴選하여 洞神祭를 올려 그해의 동민의 安家太平과 時和年을 祈願하고 있다.

죽전(竹田)마을

대밭골 즉 예부터 이곳에 대나무가 무성했음으로 竹田으로 이름 하였다. 끝에 있다고 해서 일명 대밭끝이라고도 불린다. 이 마을은 수정리의 攝洞으로 약 300년전부터 밀양박씨의 입구산 정착지로 소촌을 이루고 있다. 또한 마을 앞의 바닷가에 박필환씨가 1973년에 건립했다는 낙원장이라는 규모가 제법 큰 휴양처가 있어 주말이면 도시인들이 심신 휴양차 왕래가 빈번하다고 한다.

안녕(安寧)마을

아득한 옛날 이 마을엔 安氏가 먼저 들어와서 안씨가 편히 살 곳이란 뜻으로 安寧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그 뒤에 豊川 盧씨가 약 300년전에 입구산 정착한 곳이다. 지형은 3면이 산으로 감싸여있고 북쪽만 바다를 보고 있는 오목한 어촌마을이다. 作故한 盧斗七公은 약 4~5백석의 부자였다. 주민은 豊川盧氏 金海金氏 密陽朴氏 居昌 劉씨 등으로 총 50여호가 살고 있다.

장문안(長門內)마을

마을의 위치가 龜山城內에 있고 城이 길다고 해서 긴 長으로 불려져 장문안으로 명명되었단다. 즉 城內란 뜻이다. 약 120여년전에 김해김씨가 입촌하여 모두 21가구가 산기슭에 모여 살고 있다. 주민의 전언에 의하면 약 100년전에는 민가 몇채가 백령재 바로 밑에 살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 살게 되었다고 한다.

내포(內浦)리

바다에 접하고는 있으나 바다가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마을이 앉아기에 안개(內浦)라고 명명되었다. 예부터 星山 李氏門과 晋陽 姜氏門이 勢를 겨누며 살았던 마을이다. 그 외 金海金氏, 南陽洪氏, 咸安趙氏, 東萊鄭氏 등이 산다. 李氏門에서는 吏曹參判과 水軍兵馬節度使가 났고, 姜씨 門에서는 3형제가 효행이 卓越하여 旌閭되어 三孝閣이 세워졌고, 都事와 承旨의 벼슬도 났다. 또한 金氏門에선 忠孝烈 旌閭閣이 서있다(마산시 회원동 28번지소재)

욱곡(旭谷)마을

마을 앞이 바다로 툭 틔여 있음으로 남, 동쪽의 빛나는 햇살이 온 마을을 비춰 준다고 하여 빛나는 곳, 즉 빛날 旭 고을 谷자를 따서 명명하였다. 아득한 옛날엔 閔氏와 具氏가 살았던 곳이라 전해지나 그 후손은 현재 살지 않으며 현재는 全州李씨, 仁同 張氏, 昌原 黃氏, 東萊 鄭氏,忠州 池氏, 金海金氏 등이 거주하고 있다. 생업은 반농, 반어라고 하나 수산업(미드덕, 오만둥이 등)에 주력하고 있다. 그로 인한 소득도 높아 비교적 윤택한편. 입구산조는 이씨가 13대 황씨가 12대 정씨가 11대가 된다고 하니 마을의 역사는 꽤 오래이다. 본 마을은 내포리의 섭동이나 그도 작은 집이 있는데 그는 鷄島마을이다. 鷄島는 지형이 닭이 다리를 뻗고 누워있는 모습을 했다고 닭섬이라고 한다. 아주 예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삼국시대의 토기 조각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그를 증명할 수 있겠다. 이섬에 일제말기 까지 일본인 4명이 기선권현망 어업을 한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민가는 32호였다고 한다. 1973년도에 해군통제부의 군용지로 수용되어 민가는 이주되었고 현재는 민간이 출입이 어림도 없는 군사 요새지가 되었다. 그곳에 1962년도 반동교의 계도분교가 있었는데 민가 이주 시 욱곡마을로 이전(1974년) 욱곡분교장이 건립되었다.

옥계(玉溪)리

마을을 둘러싸듯이 우뚝 솟은 서쪽의 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이 玉과 같이 맑다고 하여 玉溪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엔 옥개(玉浦)라고도 불리었다. 본 마을은 남, 서, 북의 삼면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 싸였고 동쪽만 바다에 접하여 있어 지형적 조건이 전형적인 어촌이다. 예부터 星山李氏 密陽朴氏 溫陽方氏 密陽孫氏 軍威方氏 旌善全氏 金海金氏 東萊鄭氏 등이 살고 있는데 入龜山祖가 溫陽方氏 12대, 星山李氏 12대, 密陽朴氏 9대라고 한다.

신촌(新村)마을

옥계리의 섭동으로 양지 바른 곳에 자리잡은 새로이 생겨난 마을이라고 신촌이라 한다. 본 마을은 金寧金氏 의 集姓村으로 그들은 朝鮮祖 端宗때의 忠義公 白村先生의 後裔로 입구산조는 종손으로부터 11대가 된다고 하니 꽤 오래 되었다. 그 외는 全州李氏 金海 光山 慶州金氏가 살고 있으며 눈 앞에 바다가 보이나 예부터 수산업과는 인연이 멀고 농업을 주로 하고 있었으나 근래 와서 낙농업으로 농가 소득이 꽤 높은 편이다. 본 마을에는 왜정 말기까지 일본인 3가구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스즈끼(鈴木) 시마다(島田) 다카시마(高島)가구다.

반동(盤洞)리

옛날 마을 주변의 山林에 밤나무가 무성했다고 해서 밤의 마을 즉 율리(栗里)라 불렀다. 그 뒤에 동네 중심부에 지석묘가 7기나 있어 칠성안반(七星安盤)이라 하여 반동이라 명명되었다. 慶州崔氏의 집성촌이며, 본면 10개 법정리 중 남구산 6개리의 중심지라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다.(반동초교, 구남중, 구산보건지소 구산농협) 본면 인구의 2/3가 남구산에 살고 있다. 본 면에서는 가장 오래된 서당이었던 화병제는 약 250년전에 본동의 서쪽산인 화병산 아래에 위치하였는데 6.25사변때 소실 당하여 그 터만 앙상하게 남아있어 하루빨리 복원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양평(陽坪)마을

약 400여년전 밀양박씨 일문이 정착한곳. 박(朴)은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는 식물이므로 가문의 번영을 비는 뜻으로 일제말기 본 면 8대 면장이었던 朴在寬氏께서 마을명을 양평이라 이름하여 반동리의 행정리로 독립했다. 옛날에는 이 마을을 옥남(玉南)이라고 불렀다. 그 들의 입구산조는 종손의 14대조라고 한다.

구복(龜伏)리

이 마을은 지형이 거북이 바다로 입수하려고 엎드려 있는 형국임으로 龜伏으로 명명되었다. 거북등의 위치는 마을 중심부이며 거북동산의 앞은 잘록한 목으로 바닷물이 드나들어 천연적으로 생긴 염전이어서 약 70여년전까지 경영했었다. 이 거북동산은 현재 구복리 104-1번지(임금택댁)조그마한 대밭이 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는 앞바다를 에워싸고 있는 섬들이 많다. (돝섬, 쇠섬, 자라섬, 북섬, 장구섬, 징섬, 납섬, 긴섬, 곰섬) 본 마을은 저도와 장구마을이 섭동을 끼고 있으며, 경주정씨가 10대조 나주임씨 10대조 김녕김씨가 12대조로 김씨와 임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전형적인 어촌으로 생계는 비교적 윤택한 편이다.

장구(長久)마을

마을 앞의 바다위에 떠 있는 듯이 조그만 섬이 長鼓와 같은 형국으로 생겼기에 장구로 명하였단다. 본 마을은 오래 전부터 안동권씨가 주인 격이었다. 그들의 입구산조가 9대조가 된다니 말이다. 안동권씨 다음으로 성산이씨, 안동김씨, 해주오씨 등이 아담한 갯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저도(猪島)마을

지형이 마치 돼지가 누워있는 것 같은 형국이므로 돝(猪)자를 써서 이름 하였다. 蓮湖부락이라고도 한다. 이 섬에도 꽤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그것은 가야시대의 유물인 듯 밭을 갈다가 토기 조각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 때 왜적의 도륙이 두려워서 묻어두고 피난 갔다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약 60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나룻배를 운용했으나 연륙교(1987년) 가설과 함께 없어졌으며, 신 연륙교를 2004년 12월에 가설하여 마산시의 명물이 되었다

심리(深里)

浦口灣이 깊은 곳에 자리했기에 심리라 했다. 이 마을은 예부터 晋陽鄭氏가 주인 격이고 月城李氏 驪陽陣氏 達成徐氏 坡平尹氏, 晋陽姜氏, 仁同張氏 등 이 居住하면서 半農. 半漁로 생활하고 있었으며, 본 면의 남단에 위치하므로 육상교통은 불편하고 해상교통이 발달하였으나 현재는 마을 앞을 지나는 도로가 國道로 지정(2009년 1월)되어 隔世之感을 느끼게 한다. 한 가지 갸륵하게 여겨지는 것은 약 270년전부터 守護神으로 奉祀하고 있는 辛씨 할머니의 貞烈閣의 보존사업과 해마다의 제사에 온 동민이 정성을 다하고 있다니 동민들은 마땅히 복 받으리라.

용호(龍湖)마을

마을 앞의 바다가 호수와 같이 잔잔한데다 주위의 산들은 盆地를 이루었으니 마치 龍이 알을 품고 누워있는 것 같은 지형이므로 龍湖라 이름 지었다. 본 마을은 晋陽姜氏 몇 가구를 빼고 達成徐氏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으로 옛날에는 반농 반어형태였으나 현재는 굴양식으로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아랫마을에선 조선조 말엽에 禁府都事의 벼슬을 한분의 遺墟碑가 마을 앞 언덕에 세워져있다. 이 분은 약 200석을 했다니 산간오지에 살았으면서도 이 같은 재력을 가졌다는 것은 대단하다 아니할 수 없겠다.

원전(元田)마을

본 마을은 본면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심리의 섭동으로 設津과 實利島를 포함했다. 실리도를 건너가는 나루 역할을 했다고 해서 옛 이름을 元津 設津이라 불러왔다. 津은 나루진자로 나루터란 뜻이다. 물이 귀한 곳이니 논은 적고 산비탈을 개간한 밭이 많다고 해서 마을명을 元田이라고 했다. 주민은 김해김씨가 30여호 살고 있고 여러 성씨(20여개)들이 어업을 주업으로 생활하고 있으며, 2006년 국가항으로 완공되어 그 옛날 지형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현재는 낚시배 대여, 해상콘도 대여, 연중으로 채취하는 개조개잠수기어업 등 높은 소득으로 주민들의 생활은 매우 윤택하다. 2018년 완공 예정인 이순신대교가 가설되면 천혜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져 우리나라의 관광명소로 예상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실리도(實利島)

元田마을의 攝洞으로 예부터 과실나무가 무성하여 마을 이름을 실리도로 명명하였다고 하며, 매실, 딸기, 밤 등이 많이 생산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매실나무의 고목이 남아있음. 섬의 뒷산에 분묘 2기가 있는데 1기는 용호 강씨의 7대조 묘요 또 한기는 상마전 최씨의 6대조라니 약 2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 같다. 露日戰爭때 러시아 해군의 주둔지였다고 한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함으로써 일본이 빼앗게 되었다. 광복 전까지도 大日本帝國海軍用地라는 標石이 있었다. 얼마 전 까지 만해도 그들이 구축했던 물탱크, 탄약고, 등의 흔적이 있었다. 일본군의 전승으로 러시아 해군은 철수하고 당시 전공을 세운 호시노(星野)라는 日人한테 섬 전체를 주었단다. 그 뒤를 이어 아비루, 쯔까모도 라는 日人이 관리 하였다고 함. 이 섬의 북동쪽에 초아도(招兒島)라는 작은 섬이 하나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실리도는 지형상으로 보아 사람이 머리를 풀고 양 다리를 뻗어 애(兒)를 부르는 형상이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함. 아득한 옛날에 이 섬에 살았던 어느 과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 섬에 조개 캐려고 갔다가 물이 차는 바람에 건너오는데 정신이 팔려 외동아들을 깜빡 잊고 자기만 건너 왔겠다. 그러한 사연으로 두 다리를 뻗고 통곡을 하면서 애를 부르고 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부쳐진 이름이라 함.

난포(卵抱)리

아득한 옛날엔 오염이 없는 鎭海灣의 바닷물은 푸르고 또 푸르렀을 것이다. 즉 짙고 검푸른 남색의 바닷물이 보이는 갯마을임으로 쪽빛藍 개 浦라고 불러왔음.(1592년 6월 16일 난중일기에는 藍浦로 기재 되어있음) 그러나 마을 주민들이 옛날에 卵抱였는데 일제시대 日人이 봉화산의 지형이 거북이가 알을 품은 형상이라 귀인인 탄생할 것을 두려워서 남루할 藍자 개浦로 변경하였다고 하면서 1993년 옛 지명 찾기하면서 卵抱로 마을 명을 환원하였음. 마을 뒤는 높은 산이요 앞은 바다로 탁 트인 남향의 浦口마을이라 생업은 수산업이 주이고 농사도 하고 있다. 주민은 金海金氏의 集成村이나 慶州李氏 溫陽方씨 등등 큰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김해김씨 입구산조는 종손의 15대조라고 함. 마을 뒷 산정에는 봉화대지가 있는데 한때 미사일기지가 주둔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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