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편의 영상에 담겨있는 삶과 추억 "바빠서 늙을 여유가 없어요"
창원사람 27호 [노인독립만세] - 이의재(86) VJ 겸 아름다운도전예술단 대표의 인생 2막
내가 죽어도 영상은 계속 남으니까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나섭니다.
이의재 씨는 매일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선다.
동네 하천에 꽃이 피어서, 손녀가 유치원 졸업을 해서,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서,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사람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손에 쥔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누른 다음,한 장면으로 남는 사진이 아닌 살아있는 시간이 담긴 영상을 성실하게 촬영한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은 늙고 사라져도 영상은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그는 또 어떤 추억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으로 이의재 VJ 겸 아름다운도전예술단 대표 (이하 이의재 씨)를 만나보았다.
영상이라면 남은 생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겠다
이의재 씨가 처음 카메라를 삶에 들인 것은 20여 년 전, 평생 그의 자부심이 되어주었던 직업 군인 전역을 앞두고서였다.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그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을 자신의 삶에 그려 넣었다. 하나는 남들을 위해 기꺼이 봉사하는 삶을 사는 길, 하나는 자신이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길이었다.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이 아름다운도전예술단 봉사활동과 영상을 만드는 일이었다. 다른 후보도 많았을 텐데, 이의재 씨는 어떤 이유로 영상을 만들겠다고 마음먹었을까.
“평소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어요. 카메라를 다뤄본 경험이 있으니 영상도 해 볼 만하겠다, 영상이라면 남은 생을 재미있게 보낼 수 있겠다 싶었죠.”
그렇게 이의재 씨의 인생 2막, 영상인의 삶이 시작되었다.
“다들 어떻게 촬영하고 편집을 하느냐고 궁금해하는데, 전문적으로 배울 여유는 없었고 전부 독학으로 익혔습니다. 카메라 사용설명서도 꼼꼼히 보고, 모르는 건 유튜브를 보면서 하나하나 배웠죠. 요즘엔 마음만 먹으면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여든셋인 그가 영상을 만든다고 하면 누군가는 “정말 가능해?” 의심을 할 테고, 누군가는 가벼운 취미일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이의재 씨에게 영상은 아주 진지한 일이다. 이의재 씨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처음 만난 곳도 그의 자택 2층에 있는, 편집실로 사용 중인 작은 방이었다. CD를 재활용해 만든 문패에는 ‘편집실’이라고 적혀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영상인의 느낌이 물씬 나는 장비들이 보였다. 편집할 때 사용하는 컴퓨터와 모니터 두 개, 카메라와 기타 장비들. 작업을 하는 중이었는지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편집 프로그램을 자세히 보니 최근 그가 촬영한 동네 하천이 보였다.
“편집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촬영한 걸 이렇게 저렇게 잘라도 보고, 붙여도 보고, 자막도 넣고, 음악도 넣고, 내레이션도 넣고…. 할 일이 참 많아요.”
1000편의 영상에 담겨있는 삶과 추억
매일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는 이의재 씨는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영상으로 찍는다. 한 손에 잡히는 소니 비디오 카메라에 담기는 것은 어느새 벚꽃이 만개한 동네 풍경일 때도 있고, 손녀의 졸업식일 때도 있고, 아는 사람의 칠순 잔치일 때도 있고, 그가 함께 하는 봉사 활동 현장일 때도 있다. 그리고 촬영한 장면들을 공들여 편집해 자신의 블로그와 유튜브 채널에 공유한다. 그렇게 모인 영상이 어느덧 1000편이 넘었다. 그중 이의재 씨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은 무엇일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작은아버지께서 요양원에 계실 때 생전 모습을 촬영해서 영상으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가족대화’라는 제목의 영상인데, 살아계신 작은아버지 모습도 남아있고 작은아버지 가족들이 모여서 밥을 먹는 모습도 있어요. 일찍 고아가 된 저를 업어 키워주신 작은아버지를 오랜만에 찾아뵌 날이었는데, 영상으로 남겨둬서 참 다행이지요. 가족들도 영상을 보고 아주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그 영상을 가끔 돌려보지요.”
그의 말을 들으니 앞서 영상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가 답변한 내용이 떠올랐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영상에 담긴 추억은 오래오래 살아남죠. 그래서 영상 하나하나가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하루 하루가 바빠서 늙을 여유가 없어요
이의재 씨 삶의 또 다른 큰 축은 바로 봉사 활동이다.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아름다운도전예술단에서 봉사 활동을 한 지도 어느새 20년이 넘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참 가난했습니다. 부모님을 잃고 고아원에서 자랐는데, 어찌나 배고픈 날이 많았던지 가난이 뼈에 사무치는 느낌이 뭔지 알고 살았어요. 그래서 전역을 하고 제 시간이 생기면, 꼭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 힘든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살리라 마음먹었죠.”
영상을 만드는 일을 독학으로 익혔듯, 그는 봉사 활동을 하기 위한 여러 기술도 스스로 익혔다. 마술과 아코디언, 색소폰, 피아노, 민요 등을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했다. 60~70대 회원 20여 명이 함께하는 아름다운도전예술단은 주로 요양병원과 복지 시설을 찾아가 다양한 공연 봉사를 한다. 회원들이 각자 준비한 장기를 뽐내고, 때로는 막춤을 추기도 한다. 이들이 하는 봉사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사람들을 ‘웃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병원이나 시설에 계신 분들에게 준비한 공연을 보여드리고 그분들이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 때보다 마음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그때보다 좋은 순간이 없어요. 안 해 본 사람은 절대 모를 거예요.”
영상 만들랴, 봉사 활동 하랴. 이의재 씨는 하루하루가 바빠서 ‘늙을 여유’가 없다고 말한다. 그런 그의 꿈은 몸을 움직일 수 있는 한 영상을 만들고 봉사 활동을 이어가는 것이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상, 추억이 담긴 영상을 만들고 싶고 봉사 활동도 계속할 겁니다. 젊은 사람들도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잘 연습을 해뒀다가 나중에는 꼭 봉사로 나눔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여생을 즐겁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인터뷰가 끝나고 카메라를 챙겨 동네 하천으로 향하는 그를 따라나섰다. 무엇을 찍고 계시냐는 물음에 나무, 이파리를 찍는다고 했던 그는 몇 시간 후 휴대전화로 나와 사진작가를 찍은 영상을 전송해주었다. 영상 제목은 ‘창원사람 방문 기념’. 덕분에 그와 함께한 추억을 여러 번 재생해볼 수 있었다. 그가 부지런히 기록해나가는 하루하루가 더 많이, 더 오래 재생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답장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이의재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