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하는 헌혈에서 함께하는 헌혈로…실천하는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
창원사람 34호 [열정을 만나다] - '인생은 실천' 경남 최다 헌혈자, 최명 씨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누리집에는 헌혈에 100회 이상 참여한 헌혈자 정보를 등재 해둔 ‘명예의 전당’ 꼭지가 있다. 헌혈은 이웃 사랑, 생명 사랑을 실천한다는 점에서 ‘명예’ 와 맞춤한 듯 어울리는 말이지만, 경남 최다 헌혈자 최명 씨는 자신의 명예보다 ‘실천’이라는 말을 먼저 강조했다. 이제 막 469번째 헌혈을 마친 최명 씨를 헌혈의 집 창원센터(고운메디컬센터 5층)에서 만났다.
헌혈생활자가 되기까지
469번째 헌혈이라니. ‘대단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최명 씨는 2주에 1 회 주기적으로 헌혈을 실천하고 있다.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니면 주말 일정 1순위는 늘 헌혈이다.
“저뿐만 아니라 대부분 정기 헌혈자 들은 헌혈이 1순위일 거예요. 주변을 보면 본인 여건 대비 더 열심히 헌혈 하는 분도 계세요. 귀한 휴가를 쪼개서 헌혈하는 군인도 있고, 얼마 전에는 7년 동안 모은 헌혈증 100장을 기부한 주부도 있고요. 경남 최다 헌혈자로서 제가 목소리를 내고 있긴 하지만, 다양한 자리에서 헌혈을 실천 하는 분들의 목소리도 언론에서 담아 줬으면 좋겠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로 찾아온 헌혈버스에서 처음 헌혈한 후, 특별히 횟수를 세지 않고 꾸준히 헌혈을 실천해오던 최명 씨는 100회 헌혈을 계기로 ‘헌혈왕’으로 알려지게 된다. 횟수가 쌓일수록 헌혈의 필요성을 알릴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는 것도 주기적인 헌혈에 힘을 보탰다. 100회 때는 첫째 딸을, 300회 때는 둘째 딸을 품에 안고 헌혈의 기쁨을 나눴던 것이 진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혼자 하는 헌혈에서 함께 하는 헌혈로
최명 씨는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명예의 전당에 등록되지 않은 숨은 헌혈자도 많다고 말했다. ‘잠시 와서 피 뽑는 건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자랑하나’ 생각하는 헌혈자가 의외로 많다고. 하지만 최명 씨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혼자 하는 헌혈’에서 ‘함께 하는 헌혈’로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유는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혈액 부족 때문이다.
“헌혈 가능 연령이 16세부터 69세까지거든요. 저출생·고령화로 헌혈 가능 인구는 점점 줄어드는 반면, 혈액을 필요로 하는 인구는 점점 많아질 거고요. 헌혈 가능 인구 대비 헌혈률은 2017년 3.9%에서 2021년 3.2%로 낮아지고 있어요. 생애 처음 헌혈을 실천하는 신규 헌혈자도 줄어들고 있고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중요해요. 정말.”
우리 모두의 보행권을 위해
최명 씨는 ‘걷는 사람들’ 활동가로 보행권에도 관심을 두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04년부터 매월 셋째 주 일요일에 창원 곳곳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노인, 어린이,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의 보행권을 고민하게 되었다.
“보행권은 누구나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을 권리를 말해요. 어린이보호구 역이 대표적인 권리 장치죠. 걸으면서 겪게 되는 매연, 소음을 줄이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 보행권 확보에 포함되 고요. 어린이보호구역은 1995년 관련법 제정 이후로 제도, 예산, 시민 인식도 크게 달라졌지만 노인보호구역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최근 5년간 보행 중 교통사고 사망자 절반 이상이 65세 이상 노인인데, 우리 사회가 이 사실을 어린이 교통사고만큼 비중 있게 다루질 않거든요.”
최근 노인보호구역 지정이 늘어나고는 있지만 마을회관이나 노인복지시설 전후로 설치되는 것이 대부분. 최명 씨는 보행자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장소와 중상률을 근거로 노인 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위해 이동하는 구간, 또 전통시장 출입구에도 노인보호구역 지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의 보행권 확보는 곧 모두의 보행권과 직결된 문제. 지자체의 적극적인 관심과 예산 투입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관심과 의식 변화 역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보도와 도로 사이에는 턱이 있거든요. 보행자 안전을 위해 차가 올라오지 못하도록 해둔 최소한의 장치인데, 이마저도 없앤 곳들이 많아요. 차가 들락날락하기 편하도록, 여차하면 주차를 할 수 있도록요. 그런 곳은 ‘볼라드(자동차 출입 금지용 장애물)’를 설치해야 하는데, ‘차가 들고 나기 불편 하다’는 이유로 설치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안전에 직결된 일인 데도 당장의 불편함을 이유로 안전을 포기하는 것이 안타깝죠.”
실천하는 시민이 세상을 바꾼다
헌혈을 실천하는 것부터 보행권 확보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까지. ‘나 말고도 누군가 하겠지’ 무심코 넘겨버릴 수도 있는 일을 최명 씨는 그 누구보다 자신의 일인 듯 열정을 쏟고 있다. 그의 이타심은 어디에서 왔을까.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떠올려보면, 중학생 때 삼성병원에서 중앙 중학교까지 쓰레기를 주우면서 등교 했어요. 성격이 내성적이라 친구들이 볼까 봐 아주 일찍 등교를 했죠. 이후로는 소년소녀 가장 돕기, 장애인복지관 봉사, 수화 동아리 활동 등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헌혈이나 보행권에 관심을 두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바탕에는 ‘내가 나고 자란 우리 동네가 좀더 살기 좋은 곳이 되면 좋겠 다’라는 마음이 깔려 있는 것 같아요.”
먹고사는 문제와 저마다의 관심사로 사회문제, 지역문제에 1년 내내 관심을 두기 어렵다면 ‘한 번쯤’의 힘을 빌려보자고 최명 씨는 말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보다 누군가 헌혈증이 필요하다고 할 때, 길을 가다 헌혈의 집 전단을 맞닥뜨렸을 때 ‘나도 헌혈해볼까?’하고 한 번쯤 생각해보고, 한 번쯤은 실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보는 것.
“실천하는 시민이 세상을 바꾸고, 참여하는 만큼 세상은 긍정적으로 변한다”는 그의 믿음이 세밑 창원을 더욱 따뜻하게 밝히고 있다.